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 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 운집해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꾸어 영구행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 ....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 ]
국향에 묻혀 정든 청와대 떠나
[중앙일보] 1979.11.03
『잘 가십시오』-.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보냈다. 18년5개월동안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서울거리에는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칠순할머니에서부터 철부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날만은 미움과 노여움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지난 29일 영면(永眠)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5월 29일 작성한 일기에는 노무현 前대통령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한 감탄이 묻어난다.
노 前대통령 국민장(國民葬)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노 前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만 약 100여 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8일 서거한 김 前대통령의 국장(國葬)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국민장 보다 한 단계 높은 국장의 신세가 초라하다. 지난 1979년 박정희 前대통령 국장 당시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조문객 동원 논란 등으로 부푼 거품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노·김 前대통령 추모객 7배 이상 차이···서거 원인 주 배경
이처럼 두 前대통령의 장례기간 조문객 수에 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서거 원인, 서거 당시의 국내 정서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 前대통령의 경우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 前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관련 수사로 現정부의 정치보복, 검찰의 강압수사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증폭돼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서거해 파장이 컸다.
반면 김 前대통령은 서거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데다 폐렴 등 건강악화로 인한 입원소식이 수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돼 국민들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 속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에 대한 논란도 거국적 추모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특히 당시 ‘국민의 정부’가 주도했던 대북화해정책은 찬반논란을 낳으며 여론분열 양상을 띠었다.
전북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Y씨는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햇볕정책’을 김 前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실제 김 前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불리는 햇볕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상당수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른바 ‘퍼 주기’식 대북정책이 북한의 ‘간’을 키웠다는데 동의한다. 핵 문제를 배제한 채 진행된 각종 논의와 원조가 굶주린 북한의 배를 채웠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등 대남, 대미 도발의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이다.
................................................................................
「인터넷 月刊朝鮮」(monthly.chosun.com)이 실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인물」 설문조사에서 朴正熙가 20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과반수의 득표로써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金九(김구), 3위는 金大中(김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李承晩의 득표율은 1%에도 미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姜英勳(강영훈)-南悳祐(남덕우)-盧在鳳(노재봉) 세 전 총리의 좌담에서 세 元老는 『20세기 한국인의 최대 성취는 민족국가 건설이며 대표인물은 李承晩, 朴正熙 두 분인데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20세기 한국의 前半部(전반부)를 대표하는 분은 독립 건국운동의 지도자였던 李承晩, 후반부는 조국 근대화의 旗手(기수)였던 朴正熙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나 전 총리 세 분 같은 기성세대와 젊은 네티즌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왜 이렇게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李承晩은 金九 지지자들과 金日成 지지자들로부터 남북 분단의 책임자란 협공을 너무 오랫동안 당해왔습니다. 몇년 전 한 여론조사에선 대학생들 사이에서 李承晩의 인기가 金日成보다도 아래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몇달 전 어느 주간지가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한 「20세기 한국의 대표 知性」 조사에선 金九가 1위, 金日成이 10위로 朴正熙(18위)와 李承晩(20위)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인간생명을 말살한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히틀러, 스탈린과 함께 20세기의 3대 악마적 독재자로 불려야 마땅할 金日成을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과연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의 교육과 언론활동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던 젊은 세대들이 이승만을 잔인할 정도로 低評價(저평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듯도 싶습니다.
朴正熙가 인터넷 月刊朝鮮 독자들로부터 받은 지지표의 상당수는 李承晩에게 갖다바쳐야 할 것들입니다. 李承晩이 없었으면 朴正熙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이것들은 1960, 70년대에 朴正熙가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