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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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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안다
등록일
2017-04-18 17:28:27
조회수
226
1965.7. 이승만 대통령 가족장 장례




[ .....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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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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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경은 ....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 .......... ]





[ .....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

.....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 ...... ]






1965.7.27.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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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정오 무렵 정동 교회에서 나와 동작동으로 향해 떠난 영구차는 시청앞에 모인 약 35만명(경찰 추산)의 인파로 막혀 한동안 나아가지 못하다가 낮 12시 25분경 길이 트여 남대문쪽으로 빠져 나갔다. 시청앞에서 있을 예정이던 이 박사의 녹음 방송 등 일반 시민과의 고별절차는 취소됐다.



연도


ㅇ 이화동 입구에서부터 광목줄로 영구차를 매어 앞뒤로 사방에 남녀 90명씩 7백 20명의 남녀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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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종로 5가 로타리에는 수천 시민이 운집해서 교통은 완전두절, 종로에 접어들자 영구행렬은 제대로 틀이 잡히기 시작 , 호상 변영태 씨가 선두에 섰으며 그뒤에 태극기 초상화 행장 만장을 든 배재중학생들 해군조악대에 이어 영구차가 따라 영구차량쪽에는 2대의 경찰 백차와 기마대가 호위했다.



국립묘지


ㅇ 삼각지에서부터 차로 운구하려던 예정을 바꾸어 영구행렬은 계속 도보로 오후 2시 40분 한강 인도교를 통과 , 3시반경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하여 용사문 앞에서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을 가졌다.이 식전에서 박치순 목사의 기도와 박대통령의 조사(정총리 대독)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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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최대인파


연도의 만송시민
경찰은 백만추계


서울시경은 27일 고 이박사의 장례행렬을 보러 나온 서울 시민의 수를 1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밝히고 이날 연도 경비를 위해 관하 3천명의 경관을 동원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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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는 달리 이박사 장례식행렬이 세종로 그 자리를 지나갈 때의 연도광경은 그의 영구가 하와이로부터 돌아 오던 그날의 성관보다 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이박사의 사면초상화를 앞세운 그뒤로 5백여개를 헤는 만장과 4백여개의 조화대열 그리고 소복에 상장을 두른 수천백명의 남녀수상객과 악대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황국 꽃으로 뒤덮힌 영구차 그만하면 고 우남에게 영광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국장은 그 보다 더 성할 것이며 국민장인들 그 이상 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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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의 서울인구는 3백8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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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 박정희 대통령




[ ....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 ]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1979.10.31

매일경제



鳴咽(명인)속 焚香(분향)5일째


全國(전국)서 총 5백85만명 30일 하루동안 2백88만여명



故(고) 朴正熙(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행렬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2천1백59개 분향소에 줄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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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 (내무부집계) ......


.....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 ...... ]





"마지막 날"…분향 늘어


[중앙일보] 1979.11.02




고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전국의 분향인파는 1일까지 1천3백28만7천명(내무부집계)에 이른다. 1일 하룻 동안의 분향자수는 3백82만8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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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786







* 1980 南韓人口(남한인구) 3744만명








[ ..... 영결식 당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 ]




연합뉴스

장례식 조문 최대 인파는?


기사입력 2009-02-19



김구 200만 훌쩍..박정희는 추산 불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6일 오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가 요구된다. 명동성동에 진입하기 위한 조문행렬은 통상 2~3㎞ 정도. 특이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추모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19일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조문 첫 날 1천500명으로 '단출하게' 시작된 조문객 수는 17일 9만6천500명, 18일에는 15만2천5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2-3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5시간을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해야 김 추기경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다리에 쥐가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등 '기다리는 사람들'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10초라는 짧은 조문시간을 위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적으로 추앙받았던 다른 저명인사의 장례식에는 어느 정도의 인파가 몰렸을까.


조계종에 따르면 지난 1993년 열반한 성철 큰스님의 영결식(11월10일)에는 10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조계종 관계자는 "장례 당일에만 10만여명이 참가한 점에 비춰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에 수십 만명이 다녀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례가 끝난 후 3주간에 걸쳐 진행된 사리친견법회 동안 40만명이 다녀갔다고 조계종은 밝혔다.





해방 이후 100만 이상의 많은 조문객이 다녀간 경우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탄에 순국한 김구의 장례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서거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


김 연구사는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진 만큼 조문객수는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영결식 당일에는 인근 상가가 영업을 중지했고, 경교장에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까지 인파가 가득찼다"고 말했다.





이후 유일하게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당일(1979년.11월3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됐고, 장례기간이 9일간 지속됐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은 추산이 불가능하다고 김 연구사는 밝혔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영결식(1974년 8월18일) 때는 빈소가 마련된 청와대에 10만명이 모였다. 육 여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5일장이었다.



아울러 국민장으로 치러진 김성수 전 부통령의 장례식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만여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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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 ]




국향에 묻혀 정든 청와대 떠나



[중앙일보] 1979.11.03




『잘 가십시오』-. 고 박정희대통령의 국장일인 3일 청와대에서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에는 2백여만 명의 시민등이 나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보냈다. 18년5개월동안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잃은 국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서울거리에는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칠순할머니에서부터 철부지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이날만은 미움과 노여움을 버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청와대∼중앙청



박대통령, 소나무 울창한 영부인 곁으로|마지막 길에 상복 2백만 명|조포 62발 은은히 말없는 유족행렬



3백여m에 이르는 장의행렬이 이날 상오9시25분 청와대 문을 나서자 이른 아침부터 연도를 메웠던 시민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영구차는 전후 40명씩, 좌우 10명씩의 3군사관생도 1백 명이 앞뒤에서 이끌었으며 그 뒤에 친족대표 10명·최규하 장의위원장등 추모제에 참석했던 장의위 일행· 친척·청와대비서실·경호실 간부의 순서로 영결식장인 중앙청으로 향했다.


장의행렬이 지나는 청와대 본관에서부터 정문까지는 1백 명의 3군 사관생도가 길 양쪽에 앞에총자세로 도열했다. 정문부터 삼청동까지는 비서실·경호실 직원 5백여 명이 검은 옷에 흰 장갑차림으로 서서 떠나는 박대통령을 배웅하며 흐느꼈다.


상오 9시l5분 박대통령의 영구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평소 박대통령을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주방직원·청소부 아주머니들이 통곡을 터뜨려 또 한 차례 흐느낌의 파도를 일으켰다.


영구가 청와대 정문을 나서서부터 영결식장에 이르는 동안 박대통령의 나이수대로 62발의 조포가 경복궁 안에서 울렸다.


영구차 앞 영정을 모신 선도차에 탄 친족대표 박재석씨는 시종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연도에서 마지막 배웅을 한 청와대비서실·경호실 직원들의 슬픔을 더 북받치게 했다.



청와대주변은 이날 아침 자욱한 안개로 뒤덮였고 「아스팔트」위에는 낙엽이 흩날려 대통령을 잃은 슬픔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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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152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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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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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12] 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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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일 오후 5시까지 공식 집계된 조문객은 432만 ...... ]




‘지못미’ 노무현 추모인원 전국 500만 돌파 “미안해서..아까워서..”


2009-05-29



[뉴스엔 글 박세연 기자/사진 정유진 박준형 기자]



노무현 前 대통령의 분향소에 500만 명의 조문객들이 다녀간 것으로 파악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에 따르면 28일 오후 5시까지 공식 집계된 조문객은 432만1,306명으로 집계됐다.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는 120만명 가량의 조문객이 찾았다. 집계 시간까지 94만5,726명이 조문을 해 29일 자정까지 총 120만에 육박하는 조문객이 다녀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밖에 경기도와 서울 지역에선 각각 86만271명, 82만8776명이 조문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전날인 28일 밤 늦게까지도 덕수궁 대한문 시민분향소에는 수많은 추모 인파가 모여 밤을 지새웠고, 국민장이 29일 자정까지 진행되는 만큼 조문객 숫자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노 전 대통령의 노제가 거행된 서울광장 앞 덕수궁 대한문 시민분향소에는 미처 조문하지 못한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간 운영 통계엔 종교기관, 대학교 및 개인운영 분향소 등이 제외됐기에 실제 조문객은 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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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292203534100







2009-05-29


역대 최대 추모 인파 몰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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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노제로 향하는 운구 행렬에 상당 수 추모객들이 뒤따르면서 인파는 크게 늘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은 최대 수용 인원을 서울 광장 5만 명, 광화문 일대 12만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수십만 명이 시청 앞 서울광장과 주변에 모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엿새동안 통제됐던 서울광장에서 노제가 열리는 점이 큰 변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1987년 서울 광장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노제 때는 경찰 집계로 15만명, 주최 측 집계로 100만 명이 참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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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 ]





<김前대통령서거> 되돌아본 전직 대통령 장례


노무현·최규하 국민장, 박정희 국장, 윤보선·이승만 가족장



연합 | 2009-08-18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國葬)이나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될 수 있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윤보선·이승만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지 7일만인 5월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특히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노 전 대통령의 노제(路祭)와 서울역까지 이어진 거리 운구행사에서는 최대 18만여명(경찰 추산, 노제 주최측 40만~50만명 주장)의 시민들이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어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에서 유족과 추도객들의 애도 속에 화장식이 치러진 뒤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인근의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로 안치됐고, 49재를 마친 뒤 봉화산 사자바위 아래에 조성된 묘역에 안장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전국 102곳의 정부 분향소에는 약 100만명이 조문하고, 서거 이후 안장식까지 봉하마을 분향소와 묘역에는 160만명 가량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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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국민장은 노무현·최규하 전 대통령과 1983년 미얀마 랑군 국립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순직한 당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장례식을 포함해 총 13회 엄수됐다.




반면 국장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가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9일간의 장의 기간을 거쳐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엄수됐고,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박 전 대통령의 장의기간 전국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중앙청 광장뿐 아니라 일선 읍ㆍ면ㆍ동사무소와 재외공관까지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국장 당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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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도 1965년 7월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연합






* 2009 서울시 인구 1046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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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 김 前대통령...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 박정희 ...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 ]






故 노무현·김대중 前대통령 조문객수 큰 차이, 왜?



충격적인 자살과 고령에 병환··· 서거 원인 큰 영향

전두환· 노태우 前대통령, 국장 또는 국민장 힘들어





장기영 학생기자 | etwannabe@nate.com


2009.08.26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지난 29일 영면(永眠)한 김대중 前대통령이 서거 두 달여 전인 5월 29일 작성한 일기에는 노무현 前대통령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함께 그 규모에 대한 감탄이 묻어난다.




노 前대통령 국민장(國民葬) 조문객 수는 총 500만여 명. 노 前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만 약 100여 만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그러나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지난 18일 서거한 김 前대통령의 국장(國葬) 조문객 수는 70만여 명.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국민장 보다 한 단계 높은 국장의 신세가 초라하다. 지난 1979년 박정희 前대통령 국장 당시 정부 추산 조문객 수는 무려 1천979만여 명. 조문객 동원 논란 등으로 부푼 거품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노·김 前대통령 추모객 7배 이상 차이···서거 원인 주 배경




이처럼 두 前대통령의 장례기간 조문객 수에 큰 차이가 나는 데에는 서거 원인, 서거 당시의 국내 정서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 前대통령의 경우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어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 前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 관련 수사로 現정부의 정치보복, 검찰의 강압수사 등 크고 작은 논란을 증폭돼 정부와 여당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서거해 파장이 컸다.



반면 김 前대통령은 서거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던 데다 폐렴 등 건강악화로 인한 입원소식이 수 차례 언론을 통해 보도돼 국민들은 비교적 담담한 분위기 속에 그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업적에 대한 논란도 거국적 추모 분위기를 이끌어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분석된다. 특히 당시 ‘국민의 정부’가 주도했던 대북화해정책은 찬반논란을 낳으며 여론분열 양상을 띠었다.


전북 C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생 Y씨는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어나갈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햇볕정책’을 김 前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실제 김 前대통령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고,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불리는 햇볕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상당수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른바 ‘퍼 주기’식 대북정책이 북한의 ‘간’을 키웠다는데 동의한다. 핵 문제를 배제한 채 진행된 각종 논의와 원조가 굶주린 북한의 배를 채웠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등 대남, 대미 도발의 도화선이 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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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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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관리소 방송이 조기를 달자고 수차례 호소했지만 그 숫자는 1%도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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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TV를 통해 영결식장의 의자를 눈 여겨 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3분의2가 비어있었지만, 조선일보는 2만여 명이라고 부풀렸다. 24,000개의 의자를 놓았는데 2만 명 이상이 앉았다면 저렇게 텅 비어있을 리 없다.


필자는 방송을 따라다니면서 연도에 사람들이 있는가를 보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썰렁한 거리였는데 무슨 애도하는 시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서울시청 앞에도 겨우 17,0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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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구구





박정희 분향 2000만 : 노무현 분향 500만

= 4 : 1

인구보정 5.2 : 1






이승만 장례 인파 경찰 100만 : 노무현 18만

= 5.6 : 1

인구보정 경제교통보정 20 : 1





노무현 조문 500만 : 김대중 조문 70만

= 7 : 1





종합하면,


이승만 : 박정희 : 노무현 : 김대중


= 140 : 36 : 7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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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호 月刊朝鮮



[編輯長의 편지] 「역사의 십자가를 지신 어린 羊」 李承晩할아버지,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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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月刊朝鮮」(monthly.chosun.com)이 실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인물」 설문조사에서 朴正熙가 20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과반수의 득표로써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金九(김구), 3위는 金大中(김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李承晩의 득표율은 1%에도 미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姜英勳(강영훈)-南悳祐(남덕우)-盧在鳳(노재봉) 세 전 총리의 좌담에서 세 元老는 『20세기 한국인의 최대 성취는 민족국가 건설이며 대표인물은 李承晩, 朴正熙 두 분인데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20세기 한국의 前半部(전반부)를 대표하는 분은 독립 건국운동의 지도자였던 李承晩, 후반부는 조국 근대화의 旗手(기수)였던 朴正熙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나 전 총리 세 분 같은 기성세대와 젊은 네티즌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왜 이렇게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李承晩은 金九 지지자들과 金日成 지지자들로부터 남북 분단의 책임자란 협공을 너무 오랫동안 당해왔습니다. 몇년 전 한 여론조사에선 대학생들 사이에서 李承晩의 인기가 金日成보다도 아래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몇달 전 어느 주간지가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한 「20세기 한국의 대표 知性」 조사에선 金九가 1위, 金日成이 10위로 朴正熙(18위)와 李承晩(20위)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인간생명을 말살한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히틀러, 스탈린과 함께 20세기의 3대 악마적 독재자로 불려야 마땅할 金日成을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과연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의 교육과 언론활동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던 젊은 세대들이 이승만을 잔인할 정도로 低評價(저평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 듯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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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가 인터넷 月刊朝鮮 독자들로부터 받은 지지표의 상당수는 李承晩에게 갖다바쳐야 할 것들입니다. 李承晩이 없었으면 朴正熙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李承晩이 주도한 建國, 强軍건설,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 상호방위조약 체제 구축. 이것들은 1960, 70년대에 朴正熙가 근대화를 추진하도록 지켜주고 떠받쳐준 울타리이자 주춧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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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4-18 17:28:27 211.169.1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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